520) this.width=520" align=left border=1 name=content_img[]> |
|
520) this.width=520" align=left name=content_img[]>제가 키가 좀 큽니다.
키 큰 사람이 속이 없다고 하는데 한국 속담 틀린 것을 아직 발견 못했습니다.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어르신들 모시고 강의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벌벌 떨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우리를 잘살게 만든 기반을 닦아주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또 ‘잘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강의 시작하기 전에, 여기 저희 집안을 잘 알고, 저를 도와주신 분을 소개합니다.
삼대가 선교를 했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우리 조상들은 한국을 많이 도왔지만 저는 거꾸로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 여기 앉아계십니다.
유준 박사님이십니다. 가족사 그리고 한국과의 인연
제가 공부도 잘 못한 사람인데 의과대학에 추천을 해주셔서 제가 연세대학교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더욱 더 친밀감이 가고 그렇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우리 집안에 대해서 배경설명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은 남부입니다.
남북전쟁이 미국에 일어나면서 리 장군(Robert E. Lee`1807~1870)이 백악관에 불려갔어요.
링컨이 리 장군에게 북쪽 군인 총사령관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리 장군이 큰 고심을 했어요.
‘버지니아가 고향인데 버지니아가 어디로 붙을지 모르겠다, 연합에 나갈지 남을지.’ 그래서 대통령께 “제가 제 고향하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5일 만에 버지니아가 남부로 붙기로 결의하자 남부로 말을 타고 들어가, 북부 총사령관 오퍼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남부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이게 역사의 비극이면서도 남북전쟁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요.
사실 링컨도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미국이 강해진 것은 리 장군 때문이에요.
왜냐?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전쟁에서 질 때는 깨끗이 지자! 게릴라전하지 말고 북부가 이겼으니 전쟁을 그만하자.’
멋있게 남쪽을 다 설득을 해서 조용하게 전쟁을 끝내도록 한 분이 리 장군입니다. 미국이 그때 잃은 병력이 65만 명입니다.
합병증 환자까지 합하면 한 100만 명을 잃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미시시피를 재건하면서 전쟁 끝나고 첫 예산 중 5분의 1이 의족이었습니다. 주 예산의 5분의 1, 그만큼 피해가 컸는데 거기에서 미국이 미국식을 알았어요.
우리가 엄청난 전쟁을 치르면서 거의 65만 명 이상이 죽었는데 여태까지 치른 전쟁사망자를 다 합쳐도 그때 사망자 숫자가 안 됩니다.
그렇게 남북전쟁 때 미국사람이 많이 죽게 되었지요. 어쨌든 그 역사가 끝나고 한국하고 인연을 갖습니다.
시작의 단추는 사실 조금 잘못 끼웠어요.
솔직한 역사적인 얘기를 하자면….
무슨 얘기냐면 일본하고 을사조약을 해가지고 미국이 스페니쉬와 전쟁(Spanish-American War)으로 필리핀을 갖게 되고 한국을 일본에 맡기는 을사조약이 있었지요.
어쨌든 조금 아름답지 않게 출발을 했는데 미국과 한국의 두 국가가 그렇게 출발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알렌과 언더우드는 북 장로교 출신으로서 한국 땅에 오셔서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을 세웠고, 저희 조상은 1895년에 유진 벨(Eugen Bell)이라는 분이 한국에 도착해서 2년간 언어를 배우고 1897년에 북장로교인들이
(전쟁으로 남장로교는 남쪽, 북장로교는 북쪽으로 나누어진 겁니다. 미국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쪽에 가서 선교를 열심히 해라.”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전라도가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동학후세들도 있고 그 골치 아픈 동학사건이 일어난 곳에 가서 선교를 잘해 봐라.”
그래서 저희 진외조부님께서(할머니의 아버지가 됩니다.) 1897년에 나주에 내려가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사실 나주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당시 향교가 강해서….
처음 목포에 가셔서 학교를 두 개 세웠어요.
‘영흥’하고 ‘정명’을 세우고 그 다음 1900년도 초에 광주에 올라와서 ‘숭일’과 ‘수피아’ 학교를 세우고 저희 집안의 마지막 큰 업적은 저희 할아버지가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대전서부터 전라도 지역선교를 맡게 되고 저희 할머니가 1899년 목포 태생입니다. 아버지가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고 저는 1959년, 태어날 때 예수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전주에서 태어났지만 전주가 고향은 아니고 순천에 계시던 어머님이 병원에 와서 잠깐 신세만 지고 54년도에 순천에 파송 받았던 우리 부모님하고 같이 저는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520) this.width=520" name=content_img[]>
전남 순천에서의 어린 시절과 박대통령 그런데 여러분, 지난 50년 동안의 변화로 온 인류가 변했는데, 한국의 변화는 세계변화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한국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많이 변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기 나오면서 정확하게 옛날 기억을 더듬어봤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60년대 초에 어떻게 살았는가 한국에서….
그걸 여러분들하고 오늘 좀 나누고 좋은 점, 아쉬운 점, 특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느꼈던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얼마나 가난했냐면 저희 집 주변이 다 초가집이었습니다.
제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선교부(우리집은 기와집이었지만) 그 주변집들은 다 초가집인데 점심 때 가서 그 마루에(전라도는 좀 따뜻하니까 양지 바른쪽으로 마루가 다 있습니다.)
앉아서 김치하고 고구마를 먹었어요.
근데 제가 철이 없어서 김치하고 고구마가 맛있어서 먹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밥을 못 한 거예요. 점심끼니를 김치하고 고구마만 먹는데 좀 재미도 있었어요.
항상 마루 밑에 강아지가 있고, 고구마껍질을 던지면 제 기억에 강아지가 뛰어 나와서 껍질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받아먹었어요.
근데 아주 너무 너무 형편없었어요.
제가 말 구루마 타고 다닌 것이 기억나요.
말 구루마로 모래, 자갈 같은 건축자재를 옮겼죠. 달구지도 타고 밭농사, 논농사 다 소가 했고 그래서 지금 오는 외국인한테 그 어린 시절을 설명하려면 앞이 콱 막히고 나중에 무슨 얘기를 하냐면 “민속촌에 가시면 그런 거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합니다. 그리고 또 저 개인적으로, 우리 아버지가 62년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만 불을 받았습니다.
우리 집안 전 재산이 만 불이었습니다.
그때 한국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늘 뭐라고 말씀들을 하셨는가 하니 한 2년 동안 혼란을 겪고 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킬 때
“그건 나쁜 혁명이 아니다. 사람들이 안도감을 느낀다. 아이고! 다행이다. 이제 법과 질서를 누군가 잡았기 때문에 이제 됐다.”
그래서 저희 마을뿐만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 가진 돈, 그 당시에 만 불을 증권 쪽에 아주 전문가한테 그 돈을 맡겨서….
결론적으로만 말씀드리면 우리 가족 6명 아이들이
(우리 어머님은 12명을 목표로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6명밖에 못 낳았습니다.)
다 교육을 받았고, 저희 아버님이 84년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에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그 돈(약 2억이 남았어요.)을 찾아가지고 미국에 집을 지어가지고 지금까지 편안하게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그 결론부터 말씀드리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과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 때문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제일 감사하고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
대한민국을 잘살게 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철이 들고 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전라도에서 그 당시에는 김대중 선생을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빛이 많이 가려졌지만 이제 제가 철이 들어서 그리고 이북을 왕래하면서 그런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북전문가로서 노 전 대통령 독대, “우리가 잘해주어도 북은 변하지 않아…” 여러분 제 사상도 상당히 보수로 많이 변했습니다.
좀 난센스 같지만 최근에 노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제가 노대통령 취임 5일 만에 이북전문가로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이제는 좀 얘기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제가 확인시켜드리는 일입니다.
노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 밤을 새웠어요.
‘무슨 말을 해야 이북에 대해서 이해를 하실까?’ 엄청 고민을 하고 갔습니다.
아침시간에 들어가서 만났는데 제 시간이 돌아와서 제가 뭐라고 말을 했느냐면
‘긴 얘기를 해 봐야 들을 것 같지 않고 너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니까 굉장히 짧게 이야기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노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집에 지체장애아를 키우는 분들께 제가 굉장히 조심스러운데…. “이북의 상황은 집안에 정신박약아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북한사람들이 정신박약아라는 것은 아니고….
북한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하자니 가족이고, 때리자니 가족이고, 놔두자니 집안을 엎어버립니다.
상황이 골치 아픕니다.
그러니까 정책을 펴실 때는 5년 정책을 펴시지 말고 10년, 20년 갈 수 있는 아주 단단한 정책을 펴셔야 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정책을 펴시면 안 됩니다.
냉정한 이성으로 정책을 펴십시오.” 이렇게 제가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제 얘기를 딱 10분 듣고 질문을 하나 하는 거예요. “우리가 잘하면 그이들도 우리에게 잘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잘하면 핵도 포기하고···” 그래서 “그때 53년도에 미군이 38선에서 그만둔 것은, 미국 사람들이 카우보이 정신을 가지고 있는데 그만두게 된 까닭은 러시아가 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하고 핵전쟁이 붙을까봐….
중공군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밀고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거기서 주춤한 것은 미국 사람들이 러시아의 핵 앞에서 약간 주춤했습니다.
이북사람들이 그것을 다 봤는데 핵을 포기해요?
그 사람들 핵 포기 안 합니다.
절대로 포기 안 합니다.
숨어서 몰래라도 핵을 만듭니다.”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전라도에서 보냈는데 전라도 촌놈이 거기서 조금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아마 여러분들은 실수라고 생각 안 하실 겁니다. “대통령님! 그게 문제가 아니고 핵은 만들 겁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우리 남쪽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이들한테 잘해 주면 그이들도 우리한테 잘할 거라는 그런 오해, 그런 잘못된 생각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분 얼굴이 벌겋게 변하고 누구를 부르더니 담배를 갖다달라고 하더라고요.
‘스트레스를 저 때문에 굉장히 많이 받아서 저렇구나’,
그날 저는 혹시 한국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하고 굉장히 고민을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