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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장의 헬리콥터 - 2편

SaigonKim 2009. 11. 25. 12:29

베트남 전장의 헬리콥터 - 2편  


육군은 한국전쟁 기간 이래 12개의 헬리콥터 대대를 창설할 욕구로

가득했으나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경험과 알제리에서의 정보들을

바탕으로한 연구를 계속하게된다.

육군은 개발되고 있는 CH-21샤니, 시콜스키 CH-34 쵸크토우와

CH-37 모하비 등의 헬리콥터를 군용으로서의 운용가능성에 주목했다.

 

 

 

1956년 6월, 육군은 헬리콥터 부대 발전을위한 첫번 째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조이 벤더풀 대령이 한 개조의 무장 헬리콥터 부대를 임시 편성했던 것이다.

벤더풀 대령은 그로부터 2년간에걸쳐 무장 헬리콥터의 이론을 개발하고,

각종 무기를 헬리콥터에 적용하는 실험을하게된다.

실험 말기에 가서는 한 개의 헬리콥터 여단을 편성할 수 있는 기본 골격을 마련하게된다.

비록 서류상의 편성이었지만 꾸준한 실험과 가용한 모든 헬리콥터를 끌어모아 대규모

야외 기동훈련을 실시하여 점점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또 헬리콥터의 필요성을

증폭시켰다.

 

 

그후 1960년 1월부터 육군 항공의 다양한 발전을위해 연구를 시작하여

일명 하우즈 판(Howze Board)이라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하우저 장군(Hamilton H. Howze)이 연구를 주도했기 때문에 하우즈 판 이라 불렀다.

여기에는 야전실험, 해외견학과 조언, 기동훈련을 총망라한 것이었는데

주 내용은 공중 강습사단과 기병여단 창설에 관한 것이었다.

 

장비는 무장헬리콥터와 OV-1 모호크, 그리고 그 운용에 필요한 차량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고서는 1962년8월, 미 국방장관에게 제출 되었고

즉각 보고서에대한 연구와 평가 작업에 들어가게되었다.

결국 이 보고서가 받아들여져 1963년 1월 초순에 테스트에 필요한 준비를 허가받게된다.

이것은 급변하는 베트남 정세가 많은 도움을 준 결과이기도했다.

 

이미 고든 로저 장군이 로저 판 이라는 육군의 장대한 헬리콥터 보유 계획서를

작성하여  1960년 3월, 이것을 대통령 특별 보좌관에게 제출한 바 있었다.

로저 판은 하우저 판에 가려 빛을 보진 못했으나 이들 보고서를

바탕으로 육군은 헬리콥터 사업에 발빠르게 대응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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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만 사의 OV-1 모호크(Mohawk)

미국은 남베트남군의 작전을 돕기위한 수색 및 사진 정찰용 항공기로서

고정익 항공기를 파견했다.

제23특수 항공대 소속의 OV-1은 다양한 레이다장비를 동원하여 베트콩의

위치를 파악하는 도움을 제공했다.

그리고 지상군 지원용 로켓과 폭탄, 기총을 장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격용 기체로도 전용이 가능했다.

공군은 장래성이 없다는 이유로 모호크의 개발을 강력히 반대했으나 무산되었다.

후에 기체중량이 증가되어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지게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OV- 1D Mohawk

2x 1100마력 T53-L-15 터보프롭 엔진- 삼엽 블레이드

최고속도 - 478km/h.     순항속도 - 444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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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비행학교에서 조종 교육 중인 UH-1B 헬리콥터

 

당시 케네디 대통령의 국방 자문보좌 역할을 맡았던 멕스웰 테일러 장군이 제출한

1961년도한해 동안의 베트남에관한 종합 보고서에는 남베트남군이 지형특성상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부대의 이동이 몹시 어렵고 게다가 차량도 터무니없이

부족하여 효과적인 작전수행이 어렵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케네디는 추가적인 군사고문과 헬리콥터를 베트남으로 보내도록 결정했다.

그리하여 1961년 11월, H-21 샤니를 장비한 제8 및 제57 경 헬리콥터 수송중대가

항모 카드(USN Card)로 태평양을 건너게되었고 12월1일

사이공의 항구에 도착하여 하역되었다.

여기에서 헬리콥터들은 탄손 누트 공항까지 자력으로 날아가 배치되었다.

이것은 베트남에서 행해진 미국의 첫 번 째 헬리콥터 이동이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2일 후, 1천명의 남베트남 공수부대원들이 헬리콥터에 탑승하여 베트콩 출몰

지역의 본부로 의심되는 곳에 투입되었다.

여태까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공중강습이 시작되자 베트콩은 혼비백산하여

무조건 도망가거나 숨어야했다.

쵸퍼라 명명된 이 작전에서 남베트남군은 반정부 선전활동에 쓰였던

방송장비들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첫작전(OPERATION CHOPPER)은 성공적이었지만 많은 문제도 함께 발견되었다.

대부분이 시행착오적 성격의 문제들이라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겠지만,

작전반경은 고작해야 2개의 헬리콥터 중대가 주둔한 탄손 누트 공항 주변의

시골마을 정도로 한정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잉 Vertol H-21 헬리콥터. 동체의 모양 때문에 날으는바나나로 불리었다.

1961년12월1일. 사이공에 하역된 H-21이 탄손 누트 공항으로 날아가기위해

부품들이 결합되고 있다.

오랜 항해기간 동안 염분에의한 부식을 막기위해 동체는 포장되어있었다


위장도색을한 H-21.

블랙 그린, 올리브 드랍과 탄 3색 으로 위장되었다.


  H-21헬리콥터가 남베트남군을 내려놓고 랜딩 지역을 빠져나가고있다.

 

미국은 1962년1월에 또 하나의 헬리콥터 중대를 베트남으로 보낸다.

베트남에 먼저 배치된 2개 중대와는 달리 이번에 배치되는 제93 헬리콥터 중대는

다낭 항으로부터 16km떨어진 해상까지 도달한 호위항모 크로아탄 함상에서

이륙하여 육지로 이동했다.

이날 해상의 기상은 무척 좋지 않은 상태였으나 헬리콥터는 비행에 성공했다.

 

 

베트남에 배치된 이들 3개 중대는 머지 않아 예비 부품이 부족하여

심각한 운용의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다.

높은 습도때문에 회전익 날개가 오래 가지못했던 것이다.

거기다 항공용 장비 또한 몹시 부족했다.

그러자 부품들을 전달할 목적으로 U-1A 오터로 편성된

제18 비행중대를 캔사스 주로 부터 베트남에 파견하고

그 뒤를 이어 휴이라는 닉 네임을 가지게되는

소수의 벨 UH-1 헬리콥터가 부상자 후송용 헬리콥터로서 제57 의무대에 공급되었다.

이것은 게릴라의 공격이 증가하자 남 베트남군의 작전능력을 향상시키기위한

미국의 군사원조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것에 불과했다.

 


호위항모 크로아탄 비행갑판에서 이륙하여 탄손 누트 공항으로 들어간 H-21


제57, 93 헬리콥터 중대는 베트남에 파견된 미국 헬리콥터로서는 처음으로 위장을 하게된다.

1964년2월 탄손 누트 비행장의 H-21



제57 의무대에 배속되어 남베트남 부상자 후송을 맡은 UH-1 휴이.

신속히 후방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을 수 있게되자

남베트남군의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때문에 사기가 진작되었던건 사실이나

군인은 너무 편해도 문제가 발생하는 집단이기 마련이다.

원초적으로는 발로 뛰어다녀야하는 군인들이 문명의 이기인 헬리콥터

때문에 한없이 게을러져 버렸던 것이다


UH-1A와 UH-1B는 6개의 부상자 수송용 들것을 수용할 수 있었다.


H-21의 결점은 낮은 엔진 파워였다.

한 개의 엔진으로 두 개의 로터를 작동시키는 이 기체는 병사들을 내려놓다가

진흙바닥에 빠져 버리는 경우도 빈번했다.

떨어지는 기동성에다 빈약한 무장도 큰 문제였다.

랜딩지역에서 공격받게되어도  그 방어능력이 너무나 빈약했던 것이다.

처음엔 두려워 도망가기에 바빴던 베트콩들이 H-21의 단점을 알아챘다.

이후부터 베트콩은 헬리콥터에대한  대항수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늪지대나 산 중에 추락한 헬리콥터를 회수하는 것도 골치아픈 문제였다.

이 해결책으로서 1964년에 많은 수의 H-37 리프트 헬리콥터가 베트남으로 급히 보내졌다


H-21이 베트남에 배치되고난 얼마후 지상의 베트콩에 대항하기위해

30구경 기관총을 설치했으나 적과 싸우기에는 빈약한 무장이었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기관총이 설치되자 출입문은 타거나 내릴때 매우 불편했다.

 

 

1962년초, 헬리콥터 중대들을 지원할 U-A1 오터 고정익 항공기로 구성된

제45수송항공대대가 오클라호마에서 편성되어 베트남으로 보내졌고

곧바로 H-21헬리콥터를 장비한 제33, 제81 헬리콥터 중대도 베트남으로 들어가게된다.

이들 부대는 베트남의 4개 군지역에 분산 배치되었고 미국은 단지 남베트남 병사들을

수송하는 서비스적 임무만 수행할 생각이 결코 아니었다.

 

 

1962년 4월, 시콜스키 H-34를 장비한 미 해병대의 첫 번 째 헬리콥터 기동부대인

HMM-362 기병대대가 일본군과 프랑스가 사용했던 비행장이있는

메콩 델타의 속 트랑에 기지를 건설하여 주둔했다.

 

H-21은 부족한 엔진 힘 때문에 산간지역 높은 상공으로의 비행이 불가능했으나

H-34는 훨씬 더 높은 고도에서의 작전 수행이가능했다.

H-34가 투입되자 다낭에 주둔한 제93중대는 2개월 후 HMM-362 기병대대와

기지를 교환하게된다. 

 

HMM-362 해병기병 헬리콥터 대대가 위험성이 더 높은 작전지역에 투입됨에따라

제93중대의  H-21은 좀 덜 위험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혜택을 부여받았고

따라서 그 운용률도 향상 되었다.

 



속 트랑으로 투입되기위해  H-21에 탑승하는 남베트남군


  H-34헬리콥터에 탑승하는 남베트남군. 메콩델타. 제1헬리콥터 대대(베트남군)



남베트남군과 H-34헬리콥터에 탑승한 미 해병대 기병대대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메콩 델타 지역의 속 트랑으로 들어가 비행기지를

확보하는 작전을 실시했다.

 

남 베트남군을 수송하는 HMM-362 소속 헬리콥터.

 


프랑스는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H-21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