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gonKim 2010. 4. 25. 16:16

           나 , 어렸을때  !!! 
             
           원적 :  함경남도 고원군 운곡면 천을리 727번지 
           어머니 하고 형 나는 네살때 우리는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 해야했다.
           외삼촌을 따라서 우리는 함경남도 "여도" 라는 작은섬에서 마지막 으로 철수하는
           미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배를 못탓으면 지금쯤 나는 북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전투경찰에 입대하여 지리산 공비토벌대에서 전투를 했다.
           우리는 지리산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고 6.25가 끝나자 여주를거쳐 김포에 정착했다.
           그당시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배급받은 곡식이 너무적은 양이라 허기진 배를 채울수 없었다.

           어머니는 바가지 들고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보리쌀 꾸러 다니기를 밥먹듯 했다.
           보리밥에 통밀밥 그나마 배불리 먹는것이 소원이였다.
           그당시에는 누구나 할것없이 다들 식량난에 굶주리기 일수였다.
           김포에서 성애 성자 성옥 이 3자매가 태어났다.
           7식구로 불어나자 먹고사는게 더욱더 힘들어졌다.
           그래도 철부지인 나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회택 이랑 동내 친구들과 새끼를 동구랗게 만들어 새끼공도 차고 겨울에는 썰매타고
           여름에는 "장릉"에서 미군들 한테 과자도 얻어먹고 제기차고 술레잡기며 자치기도 하고
           샛강에 가서 고기도잡고,지금 생각하면 정말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학창시절".

           형이 서울 균명 중학교에 합격하여 서울 이모님 집에서 기거하고 다음해 나는 이대 부속
           중학교에 입학하여 우리 두 형제가 이모님 집에 신세 지고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는 경찰을 사표내고 식구모두가 서울로 이사왔다.
           한남동 에서 무허가 집을 짛고 살았는데 그래도 내집이라 정말 편했다.
           아버지는 직업이 없어 외삼촌 하고 같이 공사장에서 품을 팔았지.
           얼마나  힘드셨을까!....
           어머니는 생선이나 야채를 머리에 이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지만
           먹고 사는것이 너무나 어려워서 형과 나는 여름에는 아이스케키 장사를하고
           겨울에는 메밀묵 통을메고 캄캄한 밤길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 배달하고 방과후 또 석간신문을 돌리곤 했다.
           그래도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가끔 우리는 ㄲㅜㄹ  ㄲㅜㄹ이 죽을 사먹고는 했다.
           한남동에서 용산까지 걸어다녔지만 ㄲㅜㄹ ㄲㅜㄹ 이 죽을 많이 사면 힘든줄도
           몰랐었지,
           그거나마 배불리 먹었으면!!!........,지금생각하면 그때 그것이 너무 맛이 좋왔다.

           그래도 학교가는것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한남동 에서 신촌까지 무임승차로 기차 통학을할때 차장 이나 역무원 한테 걸려서
           여러번 혼이나고했었다.
           기차를 놓지면 한남동에서 신촌 학교까지 걸어다니기도 했었지,정말 많이 걸어 다녔지.
           그때 내 단짝은 지금의 성악가 박세원 이였다.
           우리 둘은 기차통학을 했고 정말 천방지축으로 얼마나 개구장이였는지 모른다,
           3학년 진학첫날 담임 선생님은 김성찬은 아버지가 휴학계를 냈다며 내일부터는 학교에 
           다닐수 없다라는 말을듣고 나는 앞이 캄캄 해 졌다.
           급우들 한테 창피하기도 하고..........

           형이 17세때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고 앞이 캄캄했다.
           하늘도 무심하시 북에살때 누나와 남동생을 데려가시고 또무엇이 부족하여 하나뿐인
           형마저 데려 가십니까, 나는 어떻게 살라구요.정말 너무하십니다.
           형만믿고 의기양양 하던 나는 형의 사망으로 인해 의지할곳없자 기가죽고 
           의지할곳 없어 그때부터 나의 외로운 삶이 시작 된것같다.
 
           한남동 집을팔고 북한남동 에서 또 무허가로 흙벽돌집을 지었는데 허구한날
           구청 철거반에서 나와서 부시면 또다시 짛고 하기를 밥먹듯 했다.
           나는 공장에 다니면서 수송 중학교 야간부에 편입학 했지만 수업료를 내지못해
           3학년 2학기초에 휴학을 하고말았다. 이것이 나의 학력의 전부다!. "중3 중퇴"!!!......
           무엇을 해야할지???.....
                       
           "성년시절"        
           궁리끝에 해병대 지원을 했는데 만17세가 않되 지원하지 못하고 1964년 10월4일
           육군 장기 복무자(L.T.V.)로 지원했다.   
           군에가면 하루 세끼 먹는것 걱정은 없을것 아니겠는가!!!!......
           고생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을 나몰라라 하고서!!!!.......
           논산 훈련을 마치고 춘천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제1공수특전사를 지원해서 공수
           훈련을 받았다.
           1.250휘트 상공에서 점프 할때는 온 천하가 다 내것인양 느껴졌다.
           낙하산이 4초만에 펴지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볼때 그황홀함이란 점프를 안해보고는
           모를것이다.
           1966년 백마사단 공수 특전대로 파월을 하게됬다.
           행정 보직 근무자들은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하지만 나는 전투팀에 참가 해야만했다.
           왜 ! 인간이 인간을 서로 죽여야만 하는지!!!........

           귀국후 발령 받은곳은 전방에 있는 포 부대였다, 나는 포에 대해서는 아는게없다 .
           특별한 보직없이 허송세월 보내기가 따분해 전역을 하고 말았다.
           내나이 22세 친구들이 군대에 갈 무렵 나는 사회인이 되었다.       
                    
           " 청년시절"
           한남동집이 철거되고 상계동에다가 서울시에서 조그만 철거민주택을 짛어서
           방한칸씩을 주었다.
           제대후 배운것없고 기술도없고 해서 친구동생이 하는 카센타에서 무보수로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기름쟁이가 되기 싫어 그나마 그만두고 택시운전을 하다가 친척이 하는 광산에서
           일을하게 되었고
           괴산에서 일할때 꽃다운 아가씨를 만나 어려운 생활속에서 결혼을 하게 됬다.

           꿈많은 시골아가씨 서울로 시집오면 출세할땐대 과연 나는그꿈을 충족시켜

           줄수있을지 몰랐었다.                      

           나는 서울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취직을 했고 형편이 조금나아져서 고모들 전부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어느날 민구가 태어났다, 정말 하늘을 날것같이 기뻤다,
           행복이란 이런것이구만!,나도 이제 아버지가 됬구나.
           엄마가 건강해서 순산을하니 정말다행이었다. 

           민구2살때 우리는 대목장주의 부푼꿈을 않고 젖송아지 한마리를 사서
           대광리로 이사했다.
           문중령 집에 공짜로 살면서 엄마는 송아지 기르고 나는 서울시내버스를 운전했지.
           2일근무하고 1일쉬는데 쉬는날 첫차를타고 집에와서 엄마랑 둘이서 전방에가서
           꼴을베어가지고 집에오면 오후2시쯤되지,
           나는 한숨자고 저녁막차를타고 또서울로가곤했지.집에서 자는날이 별로 없었지.
           송아지가 어미소가 되여 우유를 짤때가 되서아버지가 30만원주고 집한채 사주셨지.
           몇십년만에 합법적인 내집을 갖게 된거지.
           고생끝에 목장 우사를 완성하고 아버지 어머니는 대광리로 이사오셨지,큰고모
           작은고모는 시집가고........

           문중령집에 살때 떡두꺼비 같은 현구가 태여 났단다.
           나는 복도 많은가보다 아들을 둘이나 보았으니 말이다.
           현구역시 순산 했단다 조산원에도 안가고 집에서 태어났단다.
           엄마는 우리집에 시집와서 소 기르면서부터 고생길에 접어든거지.
           모든 일을 나보다 더 잘했단다.
           꼴을베어도 내가2단 베면 엄마는3단이상 베었지. 정말내가 이길수 없었지 ,
           너무 잘하더라!!!...
           시내버스에서 시외버스로 옮기고 난후부터는 집에서 출퇴근 할수있어서 정말 좋왔었다.
           운전하랴 목장일하랴 너무고생 스러웠지만 앞날의 행복을위해 식구모두 열심히 일했고
           즐거웠었다.

           "않되면 되게하라" "하면된다"라는 굳은 신념을갖고 !!!.......
             
           "황금 시절"
           어느날인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전곡버스 터미널 대합실에서 다리에 힘이없어서
           쓰러지고 말았지.
           욕심내서 너무 일을 무리해서, 많이해서,그런가보다 생각했었지.
           너무 쇄약해지고 힘이들어 도저히 이대로는 운전을 할수가 없어서 사표를 내고 말았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조건말이다.
           주머니에는 퇴직금 받은것 달랑 70만원 뿐이 없었지.
           소키우며 나는 제무시 운전을 했지, 전방에서 돌도 싫어 나르고 산판에서 원목도
           실어나르곤 했지.
           남의 차만 운전해야 별 소득이없어 빗을내서 나도 제무시 한대 구입 했는데 몇개월
           못하고 광산이 폐업해서 일할곳도 없고해서 홧김에 폐차시키고 말았지.
           그돈가지고 땅을 샀으면 지금쯤 부자소리 들으면서 살텐데!!!!.......
           700만원 고스란히 빗지고 말았지.고생은 직살라게 하고 말이다.
           이제 소가 제법 몇마리 늘어나고 수입도 그럭저럭 늘고해서 막내고모 대학다니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수 있었지.
           우리 집에도 대학생이 있다는 자부심도 갖게됬지.
           1987년인지 1988년인지 기억력이 없어 잘생각나지는 않지만 70만원 으로 카쎈타를
           시작했지.
           카쎈타 건물질때 할아버지랑 말다툼 많이했단다.
           내 방식대로 집을짛다보니 할아버지 생각으로는 도저히 않될것같아 의견 충돌이 많이
           된거지.
           그래도 내방식 대로 집을 완성 시키니까 그때서야 나를 인정하시더라.
           집짓는데 70만원 다 쓰고나니 공구살돈 부속살돈이 없어 소를 몇마리 팔았지.

           신서면에 차가 몇대 않되서 농기구수리하고 경운기 추레라및 트렉타 추레라도 제작하고
           철대문,우사갓쇼도 만들고 했었지, 그런대로 돈벌이가 잘되었지.
           현구가 전곡에서 집단폭행 당했을때 무척 속상했는데 민구가 그래도 형이라고 보복
           했을때는 흐믓 했단다.

           동두천 사람이 대광리에다 세차장 차린다고 해서 내가 선수쳐서 세차장 허가를 냈지.
           그때만해도 우리지역에는 세차장 허가가 1군데 뿐이 않됬지.
           나는 세차장을 하려고 한게 아닌데 엄마는 부식값이라도 번다고 세차를시작했지.
           소기르고 농사짓느라 고생많이 시켯는데 세차하면 또고생 할것같아 못하게했지만
           소용없었지.
           1년벌어 땅사고 또1년벌어 집지으니 정말그때는 정말 돈잘벌었지!.
           배고팟던 시절이 엊그저께 같은데 이만하면 내주제에 성공했다고 볼수 있겠지?.
                                                        
           "이빨빠진호랑이?."
 
           1995년7월 어느날인가 감기증세가 있었는데 아무리 약을먹어도 낳지를않고 기침이
           점점 심해졌지.
           전곡 병원에서 진찰을해도 모르겟다며 큰병원으로 가보라더구나.
           의정부 신천병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대학병원에 가보라더구나.
           나는그래도 큰병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않고 성모병원에서 진찰을받았는데
           역시 마찬가지 병명을 알수없다며 혹시 월남참전 하지않았느냐고하더라.
           고엽제가 의심스러우니 보훈병원에 가보라더구나.은근히 그때부터 겁이났었지.
           그해10월 보훈병원에서 조제한 약을먹고 부작용나서 보훈병원에 입원하게됬지.
           11월에 퇴원을 했지만 호전기미가 보이지않았지.
           나는 카센터 일을 축소해야했지,농기구 부품은 전부 대광공업사에다 넘겨주고 자동차
           정비 위주로 했지.

           1995년8월달에 고엽제 후유증 신고를 했는데 1996년2월에 고엽제 후유증 국가 유공자
           판정을받았지.
           그전에 다리가 못견디게 아팟던것이 고엽제 후유증으로인한 말초신경병 이었지.
           내가 국가유공자 판정받은 병명도 "말초신경병"이란다.
           1996년2월 또 보훈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때부터 나는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게 된거지,
           추가진단은 (1)만성 폐쇠성 폐질환 (2)천식 (3)해수.3가지 모두 완치할수 없는
           만성질환 이였지.
           다리 아프고 숨쉴수없는 고통이 계속 됬지만 이렇다할만한 특효약이 없었다.

           내가병원에 입원한후 민구가 대학졸업하고 카센타 일을 도맡아했지,
           나는 자식들한테는 이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기술전수를 해주지 않았는데
           민구는 정비에는 타고난 재능이 있는지 아무리 어려운일이라도 척척 해내더라,
           그아비에 그자식이란 말대로 말이다.
           사실 나도 어깨너머로 배운기술이지 정식으로 배운게 하나도 없단다.

           현구가 장가들던날도 나는 예식장 한구석에서 산소호흡기 신세를지고 있었지.
           경사스럽고 즐거운날인데도 나는 병마와 싸워야만 했지.

           내가일을못하자 엄마랑 민구랑 세차하면서 고생 너무많이 했었지,정말 고맙다.....
           수고들 많이했다.
           은혜가태여나고 또 비성이가 태여났을때 나는 비로서 행복이 이런거구나 느꼈지,
           정말 행복했었다.

           2002년 나는 죽음과의 사투를 또했지,주치의사는 엄마한테 더이상 가망없으니
           식구들준비하라고 하더라.
           그런데 어느날 노과장이 "김성찬씨 더이상 우리가 해줄수있는방법이 없으니 용기를
           잃지마세요" 라고 한마디 해주더구나, 그한마디가 최고 명약이었다,
           나는 용기를 잃지않고 죽음과의 사투를 벌였지.

           할머니는 내병간호하느라 당신이 아픈것도 감추시고,
           나중에는 병이악화되여 암으로 진행되서 수술을받았지만 너무 늦게 수술을해서 몇년
           못사시고 돌아가셨지,,,,,,
           할머니 돌아가실적에도 나는 자식의 도리를 못했지,
           할머니는 내가 곁에서 마지막 가시는 것을 지켜드리지 못해서 눈도 감지 못하고 돌아
           가셨대지?........


          난정말 불효막급한 놈이란다.
          민주가 그동안 할머니 병간호 하느라 고생 많이했지,...시할머니 병간호 하는
          손주며느리는 요즘 별로없을거다
          민주야 정말고맙다 나는 할머니 병간호 못했는데 네가 병간호를 더많이 했으니
          정말고맙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난후 2003년 8월 나는 내한목숨 살겠다고 혼자 고생하는 식구들
          뒤로한채 베트남으로 목숨 구걸하러 떠나고 말았지,
          이상하게도 베트남에서는 산소 호흡기가 필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을 떠나 살수없을것 같으니,..... 내가 나약해진 탓일까?.
          왜?.이렇게 타국땅에서 목숨 구걸하며 살아야 하는건지!!!!!......
          사는게 너무힘들다,외롭고 슬프고 사는 보람도없고 산다는 것이 짐승과 다를게  없지.
          2005년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나는 할아버지 곁을 지켜드리지 못했지,
          할머니 돌아가실 때도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나는 그저 한낱 불효자식에 불과했지,
          나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구나 할아버지 할머니 평생 호강한번 못시켜 드렸지.
          엄마랑 너희들이 고생 많이 했지?.

          민구엄마 그동안 시부모 잘모셔 드려서 정말고맙소.
          그동안 고생 너무많이시켜 미안하구료,용서해 주구료.
          당신 한테는 못난 남편으로 기억에 남아있을것 같구료.

          할아버지 탈상을 논의할 때도 나는 그저힘 없는 이빨빠진 호랑이일뿐 이였지.
          옛날 같으면 감히 너희 고모들이 나한테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나약해 지기만 하는지 모르겠구나.

          너희 엄마 그동안 고생 너무많이 했다, 내가,나중에 저세상 먼저 가더라도 엄마 속썩이지
          말고 호강좀 시켜 드려라.
          민주 남미 모두 고생 되겠지만 아이들 잘 보살피고 건강하게 훌륭하게 키워다오.
          식구 모두들 건강관리 잘해라 돈보다 더 중요한것이 건강 이란다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것이란다.
 
          지난 60년의 삶을 회상해 볼때 나는 낙제인생을 산것같구나.
          내가 이런글을 남기는것을 보면 나도 생을 마감할때가 된것같구나.
          너희들 힘들고 고생 스러워도 "하면 된다"라는 신념을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꼭 성공
          하리라 믿는다.
          행복하게 남의 모범이되게 살아다오.
          남기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글로 옮기려보니 생각이 잘 안나는구나,이만
          두서없는글을 마친다.                
          은혜 은경이 비성이 예지야 너희들도 건강하게 자라서 훌륭하고 타의 모범이 되게
          살아다오.                   
                       
                                    2006년3월 베트남 사이공 에서   김  성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