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gonKim 2011. 8. 12. 14:29

 

월남전쟁과 예수회  

1967년 베트남의 '인종 학살'은 윌리암 케이시(William Casey)가 구상한 CIA '봉황 작전'에서 다시 확인된다. 윌리암 케이시는 MK-Ultra/Project Monarch의 멤버이자 CIA의 라오스 및 베트남 지부장이었다.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 장군은 베트남에서 작전을 펼치던 중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로스 페로(Ross Perot)는 POW나 MIA에 연락을 할 수 없었다. CIA가 '황금의 삼각 지대'에서 아편을 밀수하는 작전을 펼치고 있어서 계속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아편의 대량 구입자는 CIA와 국방성(DOD)의 고위 관료들이었다. 테오도르 색클리(Theodore Shackley)는 조지 부시 정권 아래서 CIA의 제2인자이다. 부시는 앨리 릴리(Eli Lilly)의 이사이다. 이 회사는 코카인용 화학 선구물질을 생산하며, CIA에게 처음으로 LSD를 합성해 주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 내 마약 불법 반입의 절반 이상을 수송하고 있다. 대부분 군용 수송을 통하며 세관의 검사도 받지 않고 한 번에 여러 톤씩 반입한 다음, 민간 항공기나 화물 컨테이너에 실어 거리의 깡패 조직, 반군, 오토바이 갱들에게 유통시킨다.

닉슨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지도 않은 채 철수했으며, 바티칸이 남베트남 정부를 통제했다. 닉슨은 그래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맞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an)의 「우리는 왜 베트남에 갔나?」를 읽어 보라.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하기 10일 전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대통령이라는 고위직이 미국인의 자유 파괴용 음모를 조장하는 데 악용되었다. 그러므로 퇴임하기 전에 그 고통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하겠다." 음모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알베르토 리베라(Alberto Rivera) 박사는 자신과 악명 높은 짐 죤스(Jim Jones)가 바티칸 학교에서 교회 파괴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카스트로가 바티칸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솔더 오브 포츈(Soldier of Fortune)' 잡지 기사에 따르면 제수이트 2명이 온두라스 농부들을 납치해 쿠바로 데려간 다음 게릴라 전투 훈련을 시켰으며, 존 케네디는 생사가 걸린 피그스만 공격 당시 자유의 전투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B-26 폭격기가 이륙하는 것을 저지했다고 한다. 따라서 카스트로의 전투 비행대가 상륙자들에게 맹폭격을 퍼부었다. 그 상륙 작전은 실패하게 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모두 CIA가 조종했기 때문이다. 군대 수송 데크의 기관총은 작동되지 않았고, 대포는 녹이 슬었으며, 상륙용 탱크 6대 가운데 4대가 짐을 싣기도 전에 침몰했다.

이 피그스만 사건으로 상륙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카스트로를 제거하려는 조직적인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쿠바 혁명 위원회는 이 피그스만 상륙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암초가 많은데다 사방이 늪으로 둘러 쌓여 있고 근처에 라디오 방송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케네디는 군대를 Opa-Locka Fla.에 있는 캄캄한 비행장으로 이동시키는 척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고립되어 수비병에게 포위당했다. 다만 AM 라디오를 통해 공습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B-26 폭격기 14대 전부가 아닌 6대가 처음 공격을 했지만 최소한도의 피해만 주었고 카스트로에게 공격이 임박했음을 충분히 알려줄 뿐이었다). 그러다가 유엔 회의에서 미국의 행위가 비난을 받자, 케네디는 이를 구실로 폭격기들을 착륙시켰다(니카라구아 비행장의 낙하산 부대는 이륙도 하지 않았다). 합동 참모부 의장 렘니체르(Lemnitzer) 장군은 "그렇게 때문에 일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했다(Peter Wyden 「피그스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이는 카스트로가 제수이트이며 케네디 암살에 관여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우리가 알기로 카스트로는 일루미나이티 회원이며 제수이트 조지타운 대학교(빌 클린턴도 이 대학을 다님)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습득했다. 케네디는 IMF의 차관을 중단시키고 재무성을 통해 화폐를 발행했다(그 화폐에는 붉은 색 번호가 인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루미나이티는 암살을 계획했다. 케네디는 CIA를 해체헤서 스콜본(Skull & Bones) 조직의 협조를 얻어내려 했다. 또한 고 딘 디엠을 살해하고 베트남을 통제하지 않는 채 미군을 철수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므로 제수이트와 바티칸은 협조를 하게 되었다.

암살 계획을 확정한 사람은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였지만, 암살 계획 자체는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윌리암 세이모아(William Seymour), 클레이 쇼우(Clay Shaw), 데이빗 페리(David Ferrie, 카톨릭 사제)가 수립했다. 재정 지원은 바티칸 계통 은행인 드 파마코 아스탈드 바두즈(De Famaco Astalde Vaduz, 스위스), 리히텐슈타인(Leichtenstein, 스위스), 셀리그만 은행(Seligman, 스위스), 방카 나지오날레 드 라보로(Banca Nazionale de Lavoro, 로마)가 맡았다. 방카 나치오날레 드 라보로는 교황이 소유하고 있으며, 조지아 주의 지점을 통해 미국 농무성에서 받은 돈 50억 달러를 세탁해서 사담 후세인의 무기를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린든 존슨은 USS Maddox 및 USS C. Turner Joy를 북베트남 영해로 보내 북베트남의 공격을 유도했다(USS Maddox는 라디오를 통해 명령을 받았고, USS C. Turner Joy는 백악관의 명령을 직접 받고 출동했다). 이 계획이 바라는 결과를 낳지 못하자(두 군함은 야간에 서로 대포를 쏘았다), 존슨은 북베트남이 국제 해역에서 미국 군함에 발사를 했다고 의회와 국민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미군이 북베트남과 무장 충돌을 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했다. 나중에 존슨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에 승리자가 없으며 폭격이 항의와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다음 번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 후 언론뿐만 아니라 입법, 사법, 행정부의 어느 부서에서나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존 F. 케네디, 마르틴 루터 킹, 로버트 F. 케네디의 살인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어 미국 대통령과 대법원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 수사가 절정에 달하자 그 잔학 행위를 공모한 사람들과 숨겨진 이야기들이 증거로 나타나게 되었다(William F. Pepper 「마르틴 루터 킹 암살 배후의 진실, 살인 명령」). 위 세 사람 암살 사건의 공통점은 암살 직전에 베트남 군대 철수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FBI는 추기경 프란시스 스펠맨(Francis Spellman, 남베트남 불교도들의 학살자인 고 딘 디엠 대통령의 교사)와 상의해서 교황이 마르틴 루터 킹 Jr.과 면담을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라고 했으며, 추기경은 동의했다고 했다. 의회의 조사 위원회 위원 가운데 리 할베이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가 단독으로 존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마나크 프로젝트(Manarch Project)의 제랄드 포드(Gerald Ford)뿐이다.

LAPD 자체의 SUS 파일에 따르면, 산타아나(Santa Anna)의 마굿간에서 마취제와 고문(CIA의 마인드 컨트롤 전문가 제리 오웬(Jerry Owen), 윌리암 브랸(William Bryan) 등 DISC 팀이 추진)을 사용한 마취 프로그램에 따라 샤린샤린(Sirhan Sirhan)이 탄생했으며, 이에 따라 MPD(다중 인격 부조화 마인트 컨트롤제: CIA의 MK-Ultra-Project Manarch 제품)가 제조되었다고 한다. 이 작업은 Sirhan Sirhan은 LAPD에 고용된 CIA의 태인 유진 케자르(Thane Eugene Cesar)가 로버트 F. 케네디를 오른쪽 귀 뒤에서 저격할 때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로널드 레이건을 저격하려고 했던 죤 힌클리 2세(John Hinckley Jr.)의 동생은 조지 부시의 골프 파트너였다. 반더빌트(Vanderbilt) 석유 회사 사장 존 힌클리 1세(John Hinckley Sr.)는 텍사스에서 여러 해 동안 조지 부시의 이웃집에 살았으며, 부시가 의회에 처음으로 진출할 때 선거 운동을 해 주었다.

필리핀 주재 미국 외교관이었던 존 마이스토(John Maisto)는 파나마로 가서 CIA 공작 부대 '시민 십자군'을 훈련시켰으며, 가두 시위를 주도하고 타이어 등을 불사르면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대주교 마르코스 맥그래스(Marcos Mcgrath), 몬시그뇰 조세(Monsignor Jose), 세바스쳔 라보아(Sebastion Laboa), 사제 쟈비에르 빌라누에바(Javier Villanueva) 등은 선거 교란 작전을 펼쳤다. 이는 마닐라, 구아테말라, 니카라구아, 그레나다, 하이티에 이어서 진행된 것이었다. 대주교 맥그래스와 사제들은 파나마 법률을 고의로 어기면서 선거함을 빼앗고 개표에 개입했다. NES(뉴스 선거 서비스)는 국가 선거에서 개표와 보도를 완전 통제한 채 국민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했는데도 존 케네디가 당선될 수 있었다. 대주교 맥그래스는 나중에 파나마 군사 정권을 민간 정부로 이양시키겠다고 보장했다(이를 위해 바티칸은 파나마 기업들에게 14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 이전에 맥그래스는 라보아 및 발라누에바와 함께 노리에가를 바티칸 대사관으로 불러들여 외교상의 면책을 약속했으며, 미군에게 항복할 것인지 군대에게 포로가 되어 사살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파나마 기습은 상원 의원 알란 심슨(Alan Simpson, 워밍 주)가 계획한 것이었다. 이는 대리 정부를 모두 제거하려는 '베로나(Verona) 비밀 조약' 정책의 직접 결과로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기록은 미국 의회 기록(64회 상원 의회 제 1기 Vol. 53, part 7, 6781쪽, 1916, 4, 25)과 미국 외교 기록(1778-1884, vol. 2)에 나와 있다.

파나마 노리에가의 운명은 바티칸 대사관에 들어감과 동시에 결정되었다(이와 같은 법적 절차로는 케네디가 오스왈드를 살해했다고 살인죄로 몰아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윌리엄 쿤슬러(William Kunstler)가 마이애미 연방 법정에서 노리에가를 변호하려 했지만 노리에가가 사망함으로써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 파나마 국가 수호대는 없어졌으므로(대부분 손을 뒤로 묶인 채 미국 해병대에게 사살당했으며, 그 사진을 찍던 저널리스트 쥴리오 구에라(Julio Guerra)도 살해되었다) 파나마는 남아메리카 및 중앙 아메리카에서 미국으로 운반되는 아편의 주요 통과 지점이 되었다. 현재 조지 부시의 '파나마 마약 민주주의' 하에서는 코카인이 판을 치고 있다. 그 돈은 파나마 은행들, 곧 인터방코(Interbanko), 퍼스트 인터어메리카 은행(First Interamerica's Bank) 등에서 세탁되고 있다. 또한 현재 하이티에서는 로마 카톨릭 신부 쟝-버트랜드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가 권력에 복귀했으므로 코카인 운반 경로가 완성된 셈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바티칸은 유고슬라비아에 엄청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 기록을 보면 우스타쉬(Ustasha, 일어나다라는 동사 'ustati'에서 유래)라는 바티칸 조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우스타쉬가 S.S., S.D., 게슈타포 등을 합친 것보다도 더 악명 높았다. 이는 크로아티아 우스타쉬 주의 수장 안테 파벨릭(Ante Pavelic)이 조직했다. 파벨릭은 이를 위해 크로아티아의 대주교와 주교들을 비롯해 교황 피우스(Pius) 12세와 자주 회동했다. 히틀러가 유럽에서 악명을 떨친 것처럼 파벨릭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런데도 교황 피우스(Pius) 12세는 크로아티아 인들에게 바티칸 순례(대주교 알로지예 스테피낙(Aljzije Stepinac)이 주도)를 하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1941-1945년과 1991-1995년에 걸친 바티칸에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그대에게 미소짓고 있다. 그 미래에서는 그대 나라의 교회와 국가가 서로 이익이 되도록 조화롭게 조절될 것이다." 스테판 쿠카비카(Stane Kukavica, 프란체스코 신부)와 같은 카톨릭 신부들은 예복을 공포의 대상인 우스타쉬 살인 부대의 제복으로 갈아입고 그 사람들을 잔인하게 기습해서 금세기에는 보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고문을 자행했다. 이 인종 학살 작전은 모두 군사 임무를 담당했던 대주교 알로지예 스태피낙(Alojzije Stepinac)이 감독했다(2차 대전 군사 주둔지 가운데 세 번째로 크며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등이 80만 명 이상이나 살해된 야세노박(Jasenovac)이 그 중심지였다). 알로지예 스테피낙은 나치와 직접 협조하여 크로아티아 국가를 탄생시켰다. 보스니아에서는 우스타쉬 부활 운동을 HSP(크로아티아 국민당)이라고 하며, 그 군대를 HOS(크로아티아 방위군)이라고 한다. 도브로슬라브 파라가(Dobroslav Paraga)가 HSP를 이끌고 있다. HOS 부대(검은 군단)에는 벨기에, 오스트리아, 영국, 캐나다 용병뿐만 아니라 프랑스 용병 부대 '누벨 레지스탕스(Nouvelle Resistance)'도 포함되어 있다. HOS가 1993년 해체되자(너무 정치색이 짙으며 바티칸과 연결되어 있음이 폭로될 것이 두려워) 구성원들은 다른 부대에 흡수되었다가 108 보스니아 여단이나 국제 여단으로 통합되었다. '국가 전선', '자유 크로아티아', '자유 슬라브'도 바티칸 조직이며 '인도주의 원조(Humanitarian Aid)'가 그 앞장을 서고 있다. MPRI(버지니아에 본부를 둔 예비 용병 조직)은 펜타곤과 계약을 맺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있는 우스타쉬를 훈련시켰으며, 지금은 코소보에서 훈련을 시키고 있다. 수천 명이 단번에 살해될 수 있는 군사 충돌에서 양쪽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은 바티칸뿐이다. 곧 미군을 활용해서 이른바 휴전 지대에서 세르비아인을 조절할 수 있다. 미군이 세르비아를 무방비 상태로 유지시키는 동안 파시시트 크로아티아는 살해를 할 수 있다. 이 정책은 발칸 전역에서 계속될 것이다.